[씬터뷰] 혁신은 사랑과 함께. 보통의 혁신가 1기, 박다진님

지역에 부족한 소아 진료를 해결할 수 있을까?

혁신은 사랑과 함께.

 

 어렸을 적 아팠던 기억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지금보다 훨씬 젊은 엄마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엄마와 손잡고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고, 오렌지 맛 물약을 먹고, 침대에 누워 토닥거림을 받으며 정신없이 자고 나면 당장이라도 놀이터에 나가서 친구들을 불러 놀고 싶어졌다. 아팠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밖에 뛰어나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땐 몰랐지만 사랑이란 이름 아래 딸려오는 수많은 것들이 있었다. 아이가 아플 때 대신 아파주고 싶은 마음, 빨리 낫게 해줄 수 없어서 미안한 마음.



자식에 대한 사랑이 지역에 변화를 만들어 내는 힘이 되다

 당진에 사는 아이를 둔 부모들은, 아이가 아플 때마다 매번 이런 마음과 함께 곤욕을 겪는다. 높은 출생률을 자랑하는 그 타이틀이 무색하게 당진에는 소아과가 6곳뿐이고 소아병동은 존재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직생활을 그만두고 당진에 이사 온 박다진씨는 육아정보를 얻기 위해 가입한 맘카페에서 이런 현실을 마주쳤다. “병원 가기 힘들다는 의견이 많이 있고 새벽엔 아기가 아픈데 당장 갈 수 있는 병원이 있는지 묻는 위급한 글들도 올라와요”

 동네에 소아과가 있었고, 아이들이 아플 땐 언제나 치료받을 수 있는 곳에 살아온 다진씨에게는 이 문제는 심각하게 다가왔다. 엄마가 되면서 다진씨의 세계는 달라졌다.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를 위해 책임져야 하는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아파도 치료받을 수 없다면, 정말 살기 좋은 곳일까요?” 인터뷰 도중 곤히 잠든 아이를 바라보는 다진씨의 눈빛에서 부드럽고도 결연한 태도를 보았다.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만들기 위해 움직이는 힘, 사랑이 이 세상 한편을 바꿀 수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아파도 가지 못하는 병원

아이가 아플 때 병원에 가는 것이 어렵다는 게 상상이 안돼요. 평소엔 병원에 어떻게 가나요?

 똑딱이라는 진료 예약 앱으로 예약 전쟁을 치르거나, 현장에서 오랫동안 기다려 접수를 해요. 똑딱은 매일 진료 예약이 가능하자마자 1분 안에 마감돼요. 아이가 응급상황일 때는 앱으로 접수도 못 하는 거죠. 예약에 실패하면, 현장접수를 하러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집마다 나와서 새벽 5시부터 줄을 서요. 병원에선 예약 건 때문에 일정 인원만 접수하고 자르고요. 접수에 실패하면 다른 지역 병원으로 가요.


심각하네요. 치료가 한시라도 급한 아이들이 치료를 받을 수가 없다니.

 병원은 아플 때 진료 받는 곳이잖아요. 그런데 여기는 선착순이에요. 손가락이 빨라야 하고, 노하우가 있어야 하고요. 아이가 아파서 치료받고 싶었던 것뿐인데, 왜 이런 노력을 해야 하는지 화가 났어요.

 

아이가 10개월이라고 들었어요. 한 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시기라는데, 어떻게 참여하기로 하신 거예요?

 저희 아이는 아직 아픈 적이 없어서, 직접 겪지 않은 문제이긴 했어요. 그래도 맘카페나 단톡방을 통해 병원 관련된 소식을 들으면서 ‘누구라도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아닐까?’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던 중 친언니가 보통의 혁신가를 추천해 줬어요. ‘일상 속 불편했던 아무 문제’ 접수가 가능하다고 해서, ‘소아과 진료가 어려워 해결하고 싶다’는 주제로 신청하게 됐죠.

 

참여를 결심하셨지만, 아이 보는 일로 참여 과정이 순탄하진 않았겠어요.

 사실 직접 참여해야 하는 건지 몰랐어요. 참여가 어려운 상황을 말씀드리니, 감사하게도 인터넷 회의로 참여할 수 있었어요. 배려해 주셨는데도 지속적인 참여는 힘들 것 같았고, 팀을 만들 땐 당진에 사는 분도, 의제가 겹치는 분도 안 계셔서 ‘여기까지인가’ 생각했죠. 그런데 혼자서 팀을 만들 수도 있다고 제안이 들어왔어요. 상황과 여건 때문에 어려울 거라는 걸 아는데도 저도 모르게 “네 해볼게요” 했어요.

 

어렵다고 생각하면서도, 누군가는 꼭 시도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계속 참여하기로 결정하셨군요.

 해야만 하고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조력자분들을 믿었거든요. 자연스럽게 의견을 받아주시고, 제가 놓친 부분을 채워주시면서 바로잡아주셨고요. 조력자님과 디자이너님이 많은 것들을 도와주셨어요. 이분들의 도움이면, 끝까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모두의 간절함이 모인 곳을 향해 옮긴 발걸음

아직 아이가 아픈 적이 없어서, 관련 정보를 주변에서 얻으셨다고 하셨잖아요. 구체적인 경험 없이 활동을 기획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떻게 극복하셨어요?

제가 이런 활동을 한다고 맘카페나 단톡방에 올리니, 모두가 자기 이야기를 공유해 주고 응원해 줬어요. 자세한 정보도 많이 주시고, 캠페인 문구 작성할 때도 다 같이 의견을 내줬고요. 이 과정에서 알게 된 게 많아요. 예를 들어 ‘아이가 둘이면 똑딱을 통해 예약을 두 번 해야 하고, 한 번만 성공했을 경우엔 한 명만 진료가 가능하다‘ 같은 정보요. 주변 도움을 많이 받아서 극복할 수 있었어요.

 

이런저런 제약이 있었지만, 무사히 진행하셨군요. 그렇다면 캠페인은 어떻게 진행하셨나요?

 저희 집에서 캠페인 키트로 나누어 줄 가제 수건을 포장하고, 아이를 업고 캠페인을 진행했어요. 산부인과에서 캠페인을 열기로 했는데, 막상 가보니 미리 연락드린 분이 안 계셨어요. 당황했지만, 저희 캠페인을 설명 드렸더니 “받지 않을 이유가 없다"라며 받아주셨죠. 또 저희 아이가 그 병원에서 태어나서, ‘여기서 태어난 아이에요’하니까 더 좋아해 주셨어요.

 

아이가 태어난 곳에서 캠페인을 진행하니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아요.

 병원을 나오며 마주친 액자에 ‘마음이 원하는 일을 하세요’라고 쓰여 있었어요. 부모님께서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다른 사람도 하기 싫다. 그럴 땐 내가 하는 게 맞다’라고 하셨어요. 저도 학생들에게 ‘옳다고 믿는 일에 수고하세요’ 라고 해왔고요. 이 프로젝트도 그런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아이를 방치하는 것 같고 속상한 적도 있었거든요. 그래도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하고 여기까지 달렸는데, 그 ‘마음이 원하는 일을 하세요’라는 문구를 보는 순간 ‘내가 오랜만에 옳다고 믿는 일에 수고했구나‘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스스로를 인정하는 순간이었네요.

 그렇죠. 끝내고 나니 ‘숙제가 이제 하나 끝났다’는 생각도 들어요. 결과에 대해선 만족하지만, 욕심이 계속 생겨서 엄마들의 애타는 마음을 기관까지 전달하고 싶어졌어요. 부모들 모두의 간절한 생각이 닿는다면, 그걸 무시하고 간과할 수 있을까 싶어서요. 

 

숙제 하나가 끝났다 하셨는데, 그렇다면 다음 과제도 있다고 생각하신 거네요.

 병원 가기 힘들어 고생했던 경험이나 의견을 받아서, 행정기관이나 병원을 유치할 수 있는 곳에 전달하고 싶어요. 얼마 전에 당진에 큰 소아과 짓다가 공사가 중단됐거든요. 병원 유치를 결정하는 분은 다른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에겐 이만큼 중요한 게 없어요.

 

무언가 시작하면 기대하게 되잖아요. 다진님은 참여할 때 가졌던 기대만큼의 경험을 하셨나요?

 기대 이상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같은 불편을 겪고 있지만 육아가 정말 쉽지 않아서 불편하다 생각만 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인터넷으로 의견과 정보를 많이 주셨어요. 주변의 도움 덕에 제가 한 것에 비해 큰 성과를 낸 것 같아요. 마음도 조금 편해졌어요. 아이가 아플 때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면, 너무 죄책감이 들 것 같은데 어떻게든 엄마로서 노력을 한 거니까...

 


우리만의 행동으로 바뀔 세상

보통의 혁신가를 언니분의 추천받아서 하셨다고 말씀하셨는데, 해보니 어떠세요? 할 만한가요?

 저는 원래 이런 활동은 ‘해봐야 부질없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이런 활동에 참여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아니에요. 직접 참여하고 나니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여행하고 비슷한 것 같아요. 여행 전 준비하는 과정은 힘들지만, 결국 이만큼 잘한 게 없다며 “잘 갔다 왔다” 하잖아요. 인생에 남는 건 내가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도 일단 해보면 좋겠어요.

 

다진님과 같이 다른 참가자분들도 각자의 결과를 이뤄냈어요. 다진님의 원동력이 엄마로서의 책임감과 주변의 도움이었다면 그분들의 원동력은 뭐였을까요?

 참여하실 때부터 자신에게 확신이 있었을 거예요. 불편하다고 의견을 냈다는 건, 이 생각을 오랫동안 여러 번 하셨을 테니 나온 행동이겠죠. 그래서 실천으로 옮길 수 있었던 것 아닐까요? 또 센터에서 너무 잘 이끌어주셨어요. 만약 혼자 해야 하는 것이었다면, 저도 포기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보통의 혁신가가 마무리된 지금, 다진님께 혁신이란 무엇인가요?

 예전에는 혁신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이제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번 활동으로 병원이 유치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의 생각을 우리만의 행동으로 표현한 거잖아요. 이렇게 한다면 더 많은 일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면 정말 더 좋은 세상이 되겠죠.

 

보통의 혁신가로서 다진님의 아이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으신가요?

 ‘사람은 혼자 살 수 없고 더불어 살아가야 해. 몸도 건강해야겠지만 마음이 건강한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어. 마음이 건강해야 주변도 돌아볼 수 있거든. 도움이 필요한 곳에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면 모두가 행복한 삶과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을거야’라고 말해주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