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인터뷰를 정리하는 저는 최문철 님과 같은 마을에 삽니다. 최문철 님은 마을에서 ‘보루'라고 불리웁니다. 보루의 별칭은 턱수염 덥수룩한 털보에서 왔다고도 하고요. 발달장애 청소년들도 기억하기 쉬운 호칭에서 왔다고 합니다. 보루는 마을의 활동가이자 농부입니다. 2008년에 이사를 왔다고 하니, 마을에 산지 15년 정도가 되었네요. 보루는 <꿈이자라는뜰> 농장의 대표 일꾼입니다. <꿈이자라는뜰>은 발달장애청소년을 위한 교육농장이기도 하고, 장애와 함께 일하는 돌봄농장이기도 합니다. 오전에는 발달장애청소년들과 텃밭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어울려 농사를 짓습니다. 매년 가을에는 <허브데이>를 열어 마을 이웃들을 초대합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리며 농장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공유지 정원을 지향하기 때문이지요. 좋은 선배이자 이웃으로써 지켜보던 보루를 인터뷰하는 오늘 자리가 매우 기대됩니다. 풀무학교 생태농업전공과정에 입학 <꿈이자라는뜰> 농장(이하 ‘꿈뜰’)이 제게는 편안한 공간이에요. 농사만 계속 지을 수 있으면 참 좋겠다 생각했어요. 농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농사를 제대로 시간을 들여서 지은 거는 풀무학교 생태농업전공과정(전인적인 농민을 기르는 2년제 대안 대학. 이하 ‘전공부’)을 다닐 때 처음이었어요. 농촌에서 나고 자랐지만, 자라기만 했을 뿐이에요. 농사를 지어본 경험은 2008년부터니까 한 15년 전부터네요.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했는데 도시에서 지내는 게 쉽지 않았던 것 같아요. 나중에 나이가 들면 귀촌을 하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는데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을 시점에 그 시기를 더 빨리 앞당겨야겠다고 생각이 바뀌었어요. 농촌에 가서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살고 싶다고요. 조산원에서 출산을 하는 방법이 있다는 걸 들었어요. 조산원에서 자연분만교실이라고, 아이 낳기 전에 한 달에 한 번씩 출산에 대해 배우고 준비하는 시간이 있었어요. 조산원 출산은 병원에서 아이를 낳는 것과 완전 다른 갈래의 길이더라고요. 근데 그 방식이 삶의 방식과도 연결되는 것 같았어요. 소비적으로 사는 거랑 조금 다른 더 전통적인 방식의 삶, 농사의 삶이랑 연관된 길처럼 느껴졌어요. 농사나 조산원에서 자연 분만을 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길이었는데요. 하지만 그게 인간에게는 훨씬 더 오래된, 그러니까 무엇이 더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라 더 익숙했던 삶의 방식 아닐까. 그걸 모르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아이를 낳는 순간부터 키우는 것도 가급적 자연스러운 환경에서 아이를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러고 아이를 낳고 키우는데 그때 서울 합정동의 반지하에서 살았어요. 햇볕 들어오는 시간이 얼마 없으니 아이가 아침과 저녁에 리듬을 갖는 게 쉽지 않았어요. 천 기저귀를 쓰는데 기저귀를 말리는 것도 어려웠고요. 그즈음 탄소발자국에 대한 공부도 했는데요. 나름 돈을 많이 쓰지 않고 자원을 소비하지 않고 산다고 생각했는데도 지구를 두 개 반인가 쓰면서 살고 있다는 계산이 나오는 걸 보면서 충격을 받았어요. 제가 살기 위해서는 동시대든, 다른 시간대든 그 사람들의 것을 내가 착취하고 살고 있다는 사실이 저한테는 힘든 일이었어요. 마침 그때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선생님이 간디의 책<마을이 세계를 구한다>를 이야기하는 자리가 있었어요. 그 자리에서 서울에서 마을을 이루며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소비를 같이 하는 것만으로도 즐겁게 사는데, 생산을 같이 하면서 사는 것은 조금 더 즐거운 일이지 않을까라는 이야기를 하셨어요. 그 말도 기억에 남았어요. 간디의 책도 인상 깊었어요. 당시 저는 이주 노동자를 지원하는 단체에서 한 3년 정도 일할 때였어요. 아내는 국제구호 단체에서 한 4년 정도 일을 했어요. 둘 다 누군가를 돕거나 지원하는 단체에서 일을 하는 거잖아요. 근데 그게 그 안에서도 역시 돈에 따라갈 수밖에 없는 구조가 있는 거예요. 누군가의 후원을 받아서 필요한 곳에 잘 연결해 주는 역할은 좋은 일이기는 하지요. 그런데 그거 자체로는 한계가 있다고, 당사자들의 입장에서 무언가를 펼쳐가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이라 느꼈어요. 그런 거를 넘어서서 살아보고 싶었어요. 저 역시 누군가의 도움이나 후원을 받아서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자립해서 작업을 하면서 살아갔으면 좋겠다고요. 근데 그게 마을이라거나 작은 규모의 공간으로 전환이 필요하겠다. 얼굴을 모르고 필요에 따라 찾아가는 관계는 그러기가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런 일상적인 관계와 작은 규모로 만날 수 있는 곳에서 내 삶의 연결고리를 다시 설정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그리고 정말 우연히 홍성군 홍동면에 왔다가 풀무학교 전 교장선생님인 홍순명 선생님이 마을과 교육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시는 거를 들었어요. 전공부도 소개를 받았는데요. 이런 곳에서 생활할 수 있으면, 공부할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막연히 생각했어요. 결국 그해 겨울 입학원서를 내게 됐어요.


<꿈이자라는뜰>을 제가 시작한 건 아니에요. 꿈뜰이 시작된 건 2009년 가을이에요. 저는 2010년 2월에 졸업 했으니까 졸업을 하기 전에 시작됐죠. 전공부를 졸업하기 전에 꿈뜰 일을 같이 하자는 제안을 받았어요. 언젠가 하고 싶고 할 거라는 생각은 했죠. 하지만 이렇게 빨리 시작하게 될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죠. 잘할 자신이 있어서 하겠다고 한 것은 아니었어요. 주어진 일이니까 할 수 있는 만큼 해보고 못하면 어쩔 수 없지. 하는 데까지는 해보자 하고 시작을 하게 됐어요. 지역 초등학교, 중학교 특수교사 선생님들이 발달장애 청년들이 학교 졸업 후에 대부분 그냥 집에만 머물러 있고 고립돼서 살아가고 일자리 없이 살아가는데 이 친구들이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사회랑 연결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취지였어요. 이 친구들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살 수 있을까라고 했을 때 지역에 흔한 일이 농사를 짓는 일이니 농사짓는 공부를 초등학교 때부터 오랫동안 익혀서 농부라는 직업을 가질 수 있으면 어떨까. 그리고 농장에 취직하거나 농사를 짓는 가족들하고 같이 일을 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자. 그러면 이 친구들이 월급도 받고 자립도 하고 지역사회랑 연결되고 하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라고 선생님들이 생각했던 거예요. 근데 그게 시간이 많이 필요한 일이니까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해서 중학교, 고등학교를 쭉 이어서 할 수 있으면 어떨까. 하지만 그런 과정을 학교에서 하면 선생님들의 경우는 교장 선생님이나 프로젝트가 바뀌거나 교사가 전근을 가거나 하면 끝날 수 있기 때문에 학교 밖 누군가가 이 일을 학교와 상관없이 계속할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던 거에요. 농사나 마을에 대해 연결고리도 필요했고요. 이런 역할을 맡아달라는 부탁이 제가 졸업할 무렵 온 거예요.
어려운 길인지 당시에는 몰랐어요. 하지만 농사랑 장애가 연결되는 것에 대한 어떤 가능성들이 제게는 신선하고 재밌었어요. 근데 시간이 많이 지나면서 농촌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도 있지만, 농업이 가지고 있는 한계, 어려움을 보면서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던 일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일단 농사를 짓고 사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 같거든요. 생산성이 낮은 장애인과 수익성이 낮은 농업을 하면서 먹고산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닌 거잖아요. 하지만 이미 시작은 했고 희한한 건 아직까지는 망하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 뾰족하게 이렇게 하면 괜찮을 거야라는 게 딱히 보이지는 않아요. 그래도 한몇 년은 조금 더 뭔가 실험의 여지는 아직은 남아 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땅을 계속 돌보면 시간이 지나면서 땅심이 좋아질 거라고 기대했어요. 그러면 우리의 낮은 생산성을 조금은 만회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 7년 동안 열심히 일을 하고 땅을 만들었는데, 7년 동안 가꾼 농장을 두고 떠나야 되는 상황이 됐어요. 농지 임대가 갑자기 종료되었거든요. 지금 현재 자리에서도 장기적인 투자를 하기는 어려워요. 나무를 심는다든가 하는 것조차요. 임대받은 땅이기 때문에요. 표면적으로는 경제적인 부분과 안정적인 땅을 확보할 수 있냐의 부분도 있지만요. 가장 어려운 거는 장애랑 농사가 가지고 있는 좋은 면만 합쳐지는 건 아니잖아요. 농업 자체가 가지고 있는 막막함이 있고 장애 자체가 가지고 있는 막막함이 있는데 이 두 개가 섞였을 때의 막막함이 너무나 거대한 거예요. 당사자도 장애로 인한 괴로움을 가지고 있고 당사자의 가족들과 이웃들도 장애로 인한 괴로움이 분명히 있잖아요. 그냥 그거를 인정하고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에요. 20년을 건 실험 “농사를 지으면서 건강하게 살 수 있을 거야” 근데 왜 현실을 그러지 못할까? 그렇지 못한 이유가 뭔지 찾고 있는데요. 그 이유는 그렇게 결론 내고 싶어서가 아니에요. 농사를 지으면서 건강하게 사는 게 가능하다는 거를 입증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에요. 꿈뜰을 처음 시작할 때 저는 20년 동안 이 일을 한다. 20년이 지나면 나는 여기서 손을 뗀다. 20년이 지나서 손을 뗄 수 있을 구조를 만들고 싶다.라는 나름의 개인적인 설정이 있었거든요. 그게 이 일을 더 건강하게 오랫동안 잘할 수 있는 방식이 될 거라는 기대와 믿음이 있어요. 농촌에서 협동을 하지 않으면, 협동조합이 아닌 방식으로 어떤 게 가능할까를 생각해 보면 답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가난한 사람이 됐든, 소수자가 됐든, 덜 가진 사람이 어떻게든 협동을 하면서 살아가는 거 말고는 사실 또 답이 없다고 생각되니까요. 그 방법으로 조금 더 실험을 해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보통의 경우처럼 외부 사업비를 받아서 하는 방식이 어쩌면 쉬울 수도 있잖아요? 바깥에서 도움을 받는 걸 배제하겠다는 건 아니에요. 바깥에서 도움을 받는 게 필요하고 중요하지요. 하지만 설령 밖에서 큰돈을 쉽게 준다고 한들 그거는 우리의 속도나, 방향과 다르니 기다리라고 말을 하든, 아니면 거절을 하든, 주도권이 우리한테 있어야 되는 것 같거든요. 어떤 식으로든 장애인을 이용하는 구조를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장애인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합니다’라고 내세우면 박수를 받고 외부 지원을 받거나 끌어오기 쉽고, 그 자원을 가지고 일을 더 크게 벌리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죠. 그런 방식으로 굴러가는 경우가 있지만 저는 그렇게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거든요. 이전 직장에서의 경험이 반면교사가 된 거 같아요. 그런 것에 충족시키려고 하다 보면 당사자 장애인이 대상화되거나 포장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방식으로 일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원칙을 지키고자 했던 부분이 장애를 가진 당사자나 당사자의 가족으로부터 신뢰를 얻게 했다고 생각해요. '치유농업'이라는 말이 처음 나왔을 때 그 말이 반가우면서도 불편했어요. 어떤 지점이었냐 하면, 지금부터 한 10년 전쯤 저희 옆집 아저씨가 음독자살을 하셨거든요. 굉장히 성실하게 농사짓는 분이셨는데요. 저녁이 되면 집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자기가 농사짓는 논을 가만히 바라보고 앉아 계시는 그런 분이셨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분이 돌아가셨어요. 문병을 갔는데 이해가 안 갔어요. 농사를 지으면 건강해질 수 있어라고 이야기하는 게 치유농업인데 왜 농촌 사람들은 이렇게 건강하지 못하지, 다 골병이 들어있고 아프고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이 왜 많을까. 어떤 이들은 치유농업의 장미빛을 이야기하는데 이 뻥 뚫린 구멍은 뭐지. 그다음에 한몇 년이 더 지나서 ‘사회적농업법’을 제정한다고 하는데요. 그때 들었던 생각은 뭐냐면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농업이 사회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되는 것만 같은 상황, 강요받는 듯한 상황이 부당하다고 느껴졌거든요.

동료들과 함께 만드는 건강한 공간 이제 14년 차인데 아직까지 망하지 않았던 이유 중에 하나는 응원을 해주는 사람들 덕분이예요. 빵꾸가 나지 않게 도와줬고 이 일을 조금 더 실험해 보라는 응원이 있었어요. 땅을 구입하는 것을 도와주고 싶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2년 동안 활동비를 지원해 주겠다고 하는 그룹도 있어요. 앞으로 2년 동안 주어진 기회를 가지고 지금의 방식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 틀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올해 같이 일을 할 사람들은 저를 포함해서 총 여섯 사람이에요. 꿈뜰이 지금까지 14년을 지내면서 바깥에서 많이 도움 받은 것도 있지만 안쪽에서도 동료들이 굉장히 아껴 쓰고 적은 활동비를 받고서 일을 했거든요. 처음 시작 할 때 같이 일 할 사람을 구하는 게 쉽지가 않았어요. 왜 그랬냐면 사람들은 장애와 농사를 연결하는 것을 낯설어 했어요. 내 영역이 아니라고, 전문성이 없다고 생각했고 경험해보지 않은 일이어서 두려워 했거든요. 그리고 충분한 활동비를 제공해 줄 수 없는 상황에서 이 일을 같이 하자고 얘기하는 것도 쉽지 않았어요. 어쨌든 시간이 흐르면서는 적게 버는 일을 하지만 즐겁게 일하는 게 중요한 사람들이, 일을 배워가며 하는 것에 용기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 붙어서 지금은 좋은 동료들이 많이 늘어났어요. 제가 원하는 건 제 말을 잘 따라주는 수족 같은 로보트가 아니니까요. 서로의 마음과 의도를 알아주려고 애쓰는 동료들, 또 자기가 원하는 것을 표현하려고 애쓰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어요. 함께 일하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성장하는 것이 결국에는 사람들이 원하는 게 아닐까 싶거든요. 우리 삶에서 하루가 지나면 또 배가 고프고 하루가 지나면 또 새로운 문제가 생기듯, 우리에게서 장애가 사라질 일도 없고 매일매일 어떤 일들을 마주 할 텐데요. 잘 견뎠어, 재밌었어, 잘했어, 고마워할 수 있는 관계가 생기고, 그 과정에서 조금씩 함께 성장하는 모습을 발견하고 맛보면서 사는 게 가장 풍성하고 좋은 삶을 사는 거라고 생각을 해요.
실험을 계속해 올 수 있었던 힘 떼돈을 벌지도 못했지만 그렇다고 와장창 망해서 빚을 잔뜩 지지도 않았어요. 14년 동안 고만고만한 모험을 하면서 아슬아슬하게 지금까지 버텨온 게 아니었을까 싶어요.
제가 장애랑 농사를 연결 지은 것은 경계를 넘나드는 제 성향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는 거 같아요. 새로운 연결고리가 보이고, 가능성이 떠오르면 실험해보고 싶어요. 그러다 보니 크고 작은 무모한 일들을 계속 벌이게 되요. 물론 벌여놓은 일을 꾸준히 계속하는 게 어렵긴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안에서 새로움을 계속 찾아내려고 해요. 그래도 지금까진 방향을 잘 잡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결국에는 장애와 농사가 만날 수 있다는 믿음 장애랑 농사가 만나면 파바박 기적이 일어나서 모든 것이 다 순조롭게 해결되는 일은 생기지 않을 거에요. 그럴 수 있는 일도 아니죠. 저는 <꿈이자라는뜰>이 생물다양성(Biodiversity)과 신경다양성(Neurodiversity)이 넘치는 공간이면 좋겠어요. ADHD라든가, HSP라고 매우 민감한 사람들이라든가, 아스퍼거나 자폐라든가, 이런저런 다양한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일컬어서 신경다양성이라고 얘기를 해요. 저도 돌이켜 보면 신경 다양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생물다양성을 지키는 게 결국에는 생태계를 건강하게 유지시키는 핵심이 될 거다라고 이야기를 하잖아요. 신경다양성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사회 어디든지 계속 잘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이 되려면 다양성이 살아 있는 공간이어야 하겠죠. 이 다양성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들어 줄 거라는 믿음이라고 해야 하나, 기대라고 해야 할지, 그게 제게 있어요. 다양성이 인정되고 발현되는 곳과 아닌 곳의 차이가 분명히 있어요. 그 다양성 안에 장애도 들어가고 성소수자도 들어가고 여성과 노인, 아이를 비롯해 다양한 세대도 들어갈 거고 원주민과 귀농한 사람들도 들어갈 거고요. 근데 크레파스가 한 통에 10개가 있다고 해서 다양성이 넘친다고 말하지 않잖아요. 이게 어떤 식으로든 연결이 되거나 만나야 해요. ‘농’과 ‘촌’, 그러니까 농사와 마을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장애를 비롯한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구성원들이 스스로를 살피고 서로를 보살피는 법을 익히며 자기 모습으로 살아가는 좋은 삶을 함께 만들어가는 것. 이게 <꿈이자라는뜰>의 목표에요. 바탕이 되는 공유지(Commons. 공동체의 공유 자산)를 확보하고 그 안에서 풍성한 관계와 좋은 삶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바라기는그런 공유지가 적어도 마을 단위에 하나씩, 면 단위에 하나씩은 생기면 좋겠어요.
돈을 어떻게 벌까를 고민하는 것과는 다른 지속 가능성을 만들 수 있는 고민 기본소득 75만 원. 너무 조금 불렀나?(웃음) 지금처럼 그냥 계속 살 수 있으면 좋겠어요. 하루빨리 국민연금 받으면서 사는 나이가 됐으면 좋겠어요. 조금 더 기대한다면 농사꾼은 국민연금을 더 빨리 받는 걸로 하면 좋겠다. 꿈뜰 같은 경우는 500평 내지 1,000평을 안전하게 우리 걸로, 혹은 확보할 수 있는 커뮤니티 공간을 만들 수 있으면 그 안에서 지금처럼 즐겁게 잘 살지 않을까 생각해요. 어쨌든 농사짓고 농촌에 살면 그렇게 큰돈이 들어가는 건 아니니까요. 입에 풀칠하기 위해서 억지로 일하는 시간이 최소한이면 좋겠어요. 원대한 꿈은 땅 부자가 되는 거예요. 가늠할 수 없을 만큼의 많은 땅을 소유하는 거예요. 그래서 공유지를 많이 만들 수 있으면 좋겠어요. 꿈뜰도 그런 공유지 중에 하나가 됐으면 좋겠고요. 법적인 소유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안정적으로 쓸 수 있는 땅을 구할 수 있게 된다면 그 땅에서는 조금 더 길게 보고 생산성을 천천히라도 높일 수 있는 방식을 찾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돌멩이 하나를 쌓더라도 그게 갑자기 사라지지 않는 어떤 공간이라면 천천히 오랫동안 쌓아서 방 하나 만들고 집 하나 만들어 내는 일을 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숲이 있고, 밭이 있고, 모두의 화장실도 있고, 음식을 해먹을 수도 있고, 또 모여서 공부하거나 쉬거나 일하거나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어떨까? 큰돈은 못 벌겠지만, 돈을 어떻게 많이 벌까를 고민하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의 지속 가능성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신이 세상에 단 한 가지 문제만 해결해줄 수 있다고 한다면 어떤 돈으로 환산되는 가치나 가격이 같은 것 끼리는 다섯 배가 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가 귤을 사는데 가장 싼 귤과 가장 비싼 귤의 차이가 다섯 배가 넘지 않는 식으로요. 혹은 최저 시급이 1만 원이라면 최대 시급은 5만 원인 거죠. 자동차도 같은 수준의 자동차라면 가장 싼 자동차와 가장 비싼 자동차 단가가 다섯 배 차이만 나도록요. 사람이 죽을 때, 재산은 다 내놓고 간다. 이런 것도 생각해 봤는데요. 개인이 소유한 자산은 죽는 즉시 공공으로 돌아가는 거죠. 하지만 역시 다섯 배 제한으로 가는 게 좋겠어요.
인터뷰가 끝나갈 즈음 최문철 님(보루)이 말했습니다. “이거 다 어떻게 정리하려고?” 아차, 이야기에 빠져 듣다보니 시간가는 줄 몰랐네요. 2시간 넘는 대화의 녹취를 풀고 보니, 보루는 특별히 길고 자세한 설명의 해설사였습니다. 평소 대화만 할 때는 세심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글로 정리하려니 눈이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14년 시간을 쌓아온 이야기를 듣는 것이 가벼운 일은 아니겠지요. 이웃이자 선배인 최문철 님의 깊은 속을 곱씹어 살펴 볼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큰 행운이라 생각합니다. “나는 우리를 성벽의 사람들이라 여긴다. 시대를 통틀어 우리는 지구의 변두리에 진을 쳐 왔다. 관습에 얽매인 겁 많은 동포들과, 중세지도에 “용과 들짐승이 들끓는다.”고 기록된 알려지지 않은 땅, 그 사이에 놓인 완충지대에 말이다. 우리의 운명이란, 한쪽으로는 용이 내뿜는 불길을 맞으며, 주류 문화가 삐그덕대며 허물어지는 중에 자기 도취를 깨뜨린다며 되레 우리더러 야단하는 걸 견디는 것이다.” <문명을 지키는 마지막 성벽 위에서> 중, 진 록스던, 상추쌈 출판
별명을 지을 때,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으나, ‘보루’라는 단어가 적을 막기 위하여 튼튼하게 쌓은 구축물을 뜻한다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구조물에서는 가장 약한 곳이 전체의 약점이라고 한다는데요. 다른 곳이 아무리 튼튼해도 한 지점이 무너지면 전체가 쓰러지기 때문이겠지요. 장애라는 약한 곳에 보루를 만들어가는 <꿈이자라는뜰>과 최문철 님이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지 함께 해보고 싶어졌습니다.
<꿈이 자라는 뜰> 자세히 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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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와 농촌을 연결하는 보루
<꿈이 자라는 뜰> 최문철
오늘 인터뷰를 정리하는 저는 최문철 님과 같은 마을에 삽니다. 최문철 님은 마을에서 ‘보루'라고 불리웁니다. 보루의 별칭은 턱수염 덥수룩한 털보에서 왔다고도 하고요. 발달장애 청소년들도 기억하기 쉬운 호칭에서 왔다고 합니다. 보루는 마을의 활동가이자 농부입니다. 2008년에 이사를 왔다고 하니, 마을에 산지 15년 정도가 되었네요. 보루는 <꿈이자라는뜰> 농장의 대표 일꾼입니다. <꿈이자라는뜰>은 발달장애청소년을 위한 교육농장이기도 하고, 장애와 함께 일하는 돌봄농장이기도 합니다. 오전에는 발달장애청소년들과 텃밭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어울려 농사를 짓습니다. 매년 가을에는 <허브데이>를 열어 마을 이웃들을 초대합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리며 농장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공유지 정원을 지향하기 때문이지요. 좋은 선배이자 이웃으로써 지켜보던 보루를 인터뷰하는 오늘 자리가 매우 기대됩니다.
풀무학교 생태농업전공과정에 입학
<꿈이자라는뜰> 농장(이하 ‘꿈뜰’)이 제게는 편안한 공간이에요. 농사만 계속 지을 수 있으면 참 좋겠다 생각했어요. 농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농사를 제대로 시간을 들여서 지은 거는 풀무학교 생태농업전공과정(전인적인 농민을 기르는 2년제 대안 대학. 이하 ‘전공부’)을 다닐 때 처음이었어요. 농촌에서 나고 자랐지만, 자라기만 했을 뿐이에요. 농사를 지어본 경험은 2008년부터니까 한 15년 전부터네요.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했는데 도시에서 지내는 게 쉽지 않았던 것 같아요. 나중에 나이가 들면 귀촌을 하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는데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을 시점에 그 시기를 더 빨리 앞당겨야겠다고 생각이 바뀌었어요. 농촌에 가서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살고 싶다고요.
조산원에서 출산을 하는 방법이 있다는 걸 들었어요. 조산원에서 자연분만교실이라고, 아이 낳기 전에 한 달에 한 번씩 출산에 대해 배우고 준비하는 시간이 있었어요. 조산원 출산은 병원에서 아이를 낳는 것과 완전 다른 갈래의 길이더라고요. 근데 그 방식이 삶의 방식과도 연결되는 것 같았어요. 소비적으로 사는 거랑 조금 다른 더 전통적인 방식의 삶, 농사의 삶이랑 연관된 길처럼 느껴졌어요.
농사나 조산원에서 자연 분만을 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길이었는데요. 하지만 그게 인간에게는 훨씬 더 오래된, 그러니까 무엇이 더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라 더 익숙했던 삶의 방식 아닐까. 그걸 모르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아이를 낳는 순간부터 키우는 것도 가급적 자연스러운 환경에서 아이를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러고 아이를 낳고 키우는데 그때 서울 합정동의 반지하에서 살았어요. 햇볕 들어오는 시간이 얼마 없으니 아이가 아침과 저녁에 리듬을 갖는 게 쉽지 않았어요. 천 기저귀를 쓰는데 기저귀를 말리는 것도 어려웠고요.
그즈음 탄소발자국에 대한 공부도 했는데요. 나름 돈을 많이 쓰지 않고 자원을 소비하지 않고 산다고 생각했는데도 지구를 두 개 반인가 쓰면서 살고 있다는 계산이 나오는 걸 보면서 충격을 받았어요. 제가 살기 위해서는 동시대든, 다른 시간대든 그 사람들의 것을 내가 착취하고 살고 있다는 사실이 저한테는 힘든 일이었어요.
마침 그때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선생님이 간디의 책<마을이 세계를 구한다>를 이야기하는 자리가 있었어요. 그 자리에서 서울에서 마을을 이루며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소비를 같이 하는 것만으로도 즐겁게 사는데, 생산을 같이 하면서 사는 것은 조금 더 즐거운 일이지 않을까라는 이야기를 하셨어요. 그 말도 기억에 남았어요.
간디의 책도 인상 깊었어요. 당시 저는 이주 노동자를 지원하는 단체에서 한 3년 정도 일할 때였어요. 아내는 국제구호 단체에서 한 4년 정도 일을 했어요. 둘 다 누군가를 돕거나 지원하는 단체에서 일을 하는 거잖아요. 근데 그게 그 안에서도 역시 돈에 따라갈 수밖에 없는 구조가 있는 거예요. 누군가의 후원을 받아서 필요한 곳에 잘 연결해 주는 역할은 좋은 일이기는 하지요. 그런데 그거 자체로는 한계가 있다고, 당사자들의 입장에서 무언가를 펼쳐가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이라 느꼈어요. 그런 거를 넘어서서 살아보고 싶었어요. 저 역시 누군가의 도움이나 후원을 받아서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자립해서 작업을 하면서 살아갔으면 좋겠다고요.
근데 그게 마을이라거나 작은 규모의 공간으로 전환이 필요하겠다. 얼굴을 모르고 필요에 따라 찾아가는 관계는 그러기가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런 일상적인 관계와 작은 규모로 만날 수 있는 곳에서 내 삶의 연결고리를 다시 설정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그리고 정말 우연히 홍성군 홍동면에 왔다가 풀무학교 전 교장선생님인 홍순명 선생님이 마을과 교육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시는 거를 들었어요. 전공부도 소개를 받았는데요. 이런 곳에서 생활할 수 있으면, 공부할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막연히 생각했어요. 결국 그해 겨울 입학원서를 내게 됐어요.
<꿈이자라는뜰>을 제가 시작한 건 아니에요.
꿈뜰이 시작된 건 2009년 가을이에요. 저는 2010년 2월에 졸업 했으니까 졸업을 하기 전에 시작됐죠. 전공부를 졸업하기 전에 꿈뜰 일을 같이 하자는 제안을 받았어요. 언젠가 하고 싶고 할 거라는 생각은 했죠. 하지만 이렇게 빨리 시작하게 될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죠. 잘할 자신이 있어서 하겠다고 한 것은 아니었어요. 주어진 일이니까 할 수 있는 만큼 해보고 못하면 어쩔 수 없지. 하는 데까지는 해보자 하고 시작을 하게 됐어요.
지역 초등학교, 중학교 특수교사 선생님들이 발달장애 청년들이 학교 졸업 후에 대부분 그냥 집에만 머물러 있고 고립돼서 살아가고 일자리 없이 살아가는데 이 친구들이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사회랑 연결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취지였어요.
이 친구들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살 수 있을까라고 했을 때 지역에 흔한 일이 농사를 짓는 일이니 농사짓는 공부를 초등학교 때부터 오랫동안 익혀서 농부라는 직업을 가질 수 있으면 어떨까. 그리고 농장에 취직하거나 농사를 짓는 가족들하고 같이 일을 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자. 그러면 이 친구들이 월급도 받고 자립도 하고 지역사회랑 연결되고 하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라고 선생님들이 생각했던 거예요.
근데 그게 시간이 많이 필요한 일이니까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해서 중학교, 고등학교를 쭉 이어서 할 수 있으면 어떨까. 하지만 그런 과정을 학교에서 하면 선생님들의 경우는 교장 선생님이나 프로젝트가 바뀌거나 교사가 전근을 가거나 하면 끝날 수 있기 때문에 학교 밖 누군가가 이 일을 학교와 상관없이 계속할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던 거에요. 농사나 마을에 대해 연결고리도 필요했고요. 이런 역할을 맡아달라는 부탁이 제가 졸업할 무렵 온 거예요.
어려운 길인지 당시에는 몰랐어요.
하지만 농사랑 장애가 연결되는 것에 대한 어떤 가능성들이 제게는 신선하고 재밌었어요. 근데 시간이 많이 지나면서 농촌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도 있지만, 농업이 가지고 있는 한계, 어려움을 보면서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던 일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일단 농사를 짓고 사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 같거든요. 생산성이 낮은 장애인과 수익성이 낮은 농업을 하면서 먹고산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닌 거잖아요. 하지만 이미 시작은 했고 희한한 건 아직까지는 망하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 뾰족하게 이렇게 하면 괜찮을 거야라는 게 딱히 보이지는 않아요. 그래도 한몇 년은 조금 더 뭔가 실험의 여지는 아직은 남아 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땅을 계속 돌보면 시간이 지나면서 땅심이 좋아질 거라고 기대했어요. 그러면 우리의 낮은 생산성을 조금은 만회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 7년 동안 열심히 일을 하고 땅을 만들었는데, 7년 동안 가꾼 농장을 두고 떠나야 되는 상황이 됐어요. 농지 임대가 갑자기 종료되었거든요. 지금 현재 자리에서도 장기적인 투자를 하기는 어려워요. 나무를 심는다든가 하는 것조차요. 임대받은 땅이기 때문에요.
표면적으로는 경제적인 부분과 안정적인 땅을 확보할 수 있냐의 부분도 있지만요. 가장 어려운 거는 장애랑 농사가 가지고 있는 좋은 면만 합쳐지는 건 아니잖아요. 농업 자체가 가지고 있는 막막함이 있고 장애 자체가 가지고 있는 막막함이 있는데 이 두 개가 섞였을 때의 막막함이 너무나 거대한 거예요. 당사자도 장애로 인한 괴로움을 가지고 있고 당사자의 가족들과 이웃들도 장애로 인한 괴로움이 분명히 있잖아요. 그냥 그거를 인정하고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에요.
20년을 건 실험
“농사를 지으면서 건강하게 살 수 있을 거야” 근데 왜 현실을 그러지 못할까? 그렇지 못한 이유가 뭔지 찾고 있는데요. 그 이유는 그렇게 결론 내고 싶어서가 아니에요. 농사를 지으면서 건강하게 사는 게 가능하다는 거를 입증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에요.
꿈뜰을 처음 시작할 때 저는 20년 동안 이 일을 한다. 20년이 지나면 나는 여기서 손을 뗀다. 20년이 지나서 손을 뗄 수 있을 구조를 만들고 싶다.라는 나름의 개인적인 설정이 있었거든요. 그게 이 일을 더 건강하게 오랫동안 잘할 수 있는 방식이 될 거라는 기대와 믿음이 있어요.
농촌에서 협동을 하지 않으면, 협동조합이 아닌 방식으로 어떤 게 가능할까를 생각해 보면 답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가난한 사람이 됐든, 소수자가 됐든, 덜 가진 사람이 어떻게든 협동을 하면서 살아가는 거 말고는 사실 또 답이 없다고 생각되니까요. 그 방법으로 조금 더 실험을 해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보통의 경우처럼 외부 사업비를 받아서 하는 방식이 어쩌면 쉬울 수도 있잖아요?
바깥에서 도움을 받는 걸 배제하겠다는 건 아니에요. 바깥에서 도움을 받는 게 필요하고 중요하지요. 하지만 설령 밖에서 큰돈을 쉽게 준다고 한들 그거는 우리의 속도나, 방향과 다르니 기다리라고 말을 하든, 아니면 거절을 하든, 주도권이 우리한테 있어야 되는 것 같거든요.
어떤 식으로든 장애인을 이용하는 구조를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장애인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합니다’라고 내세우면 박수를 받고 외부 지원을 받거나 끌어오기 쉽고, 그 자원을 가지고 일을 더 크게 벌리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죠. 그런 방식으로 굴러가는 경우가 있지만 저는 그렇게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거든요. 이전 직장에서의 경험이 반면교사가 된 거 같아요.
그런 것에 충족시키려고 하다 보면 당사자 장애인이 대상화되거나 포장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방식으로 일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원칙을 지키고자 했던 부분이 장애를 가진 당사자나 당사자의 가족으로부터 신뢰를 얻게 했다고 생각해요.
'치유농업'이라는 말이 처음 나왔을 때 그 말이 반가우면서도 불편했어요. 어떤 지점이었냐 하면, 지금부터 한 10년 전쯤 저희 옆집 아저씨가 음독자살을 하셨거든요. 굉장히 성실하게 농사짓는 분이셨는데요. 저녁이 되면 집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자기가 농사짓는 논을 가만히 바라보고 앉아 계시는 그런 분이셨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분이 돌아가셨어요. 문병을 갔는데 이해가 안 갔어요. 농사를 지으면 건강해질 수 있어라고 이야기하는 게 치유농업인데 왜 농촌 사람들은 이렇게 건강하지 못하지, 다 골병이 들어있고 아프고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이 왜 많을까.
어떤 이들은 치유농업의 장미빛을 이야기하는데 이 뻥 뚫린 구멍은 뭐지. 그다음에 한몇 년이 더 지나서 ‘사회적농업법’을 제정한다고 하는데요. 그때 들었던 생각은 뭐냐면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농업이 사회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되는 것만 같은 상황, 강요받는 듯한 상황이 부당하다고 느껴졌거든요.
동료들과 함께 만드는 건강한 공간
이제 14년 차인데 아직까지 망하지 않았던 이유 중에 하나는 응원을 해주는 사람들 덕분이예요. 빵꾸가 나지 않게 도와줬고 이 일을 조금 더 실험해 보라는 응원이 있었어요. 땅을 구입하는 것을 도와주고 싶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2년 동안 활동비를 지원해 주겠다고 하는 그룹도 있어요. 앞으로 2년 동안 주어진 기회를 가지고 지금의 방식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 틀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올해 같이 일을 할 사람들은 저를 포함해서 총 여섯 사람이에요. 꿈뜰이 지금까지 14년을 지내면서 바깥에서 많이 도움 받은 것도 있지만 안쪽에서도 동료들이 굉장히 아껴 쓰고 적은 활동비를 받고서 일을 했거든요.
처음 시작 할 때 같이 일 할 사람을 구하는 게 쉽지가 않았어요. 왜 그랬냐면 사람들은 장애와 농사를 연결하는 것을 낯설어 했어요. 내 영역이 아니라고, 전문성이 없다고 생각했고 경험해보지 않은 일이어서 두려워 했거든요. 그리고 충분한 활동비를 제공해 줄 수 없는 상황에서 이 일을 같이 하자고 얘기하는 것도 쉽지 않았어요. 어쨌든 시간이 흐르면서는 적게 버는 일을 하지만 즐겁게 일하는 게 중요한 사람들이, 일을 배워가며 하는 것에 용기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 붙어서 지금은 좋은 동료들이 많이 늘어났어요.
제가 원하는 건 제 말을 잘 따라주는 수족 같은 로보트가 아니니까요. 서로의 마음과 의도를 알아주려고 애쓰는 동료들, 또 자기가 원하는 것을 표현하려고 애쓰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어요. 함께 일하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성장하는 것이 결국에는 사람들이 원하는 게 아닐까 싶거든요. 우리 삶에서 하루가 지나면 또 배가 고프고 하루가 지나면 또 새로운 문제가 생기듯, 우리에게서 장애가 사라질 일도 없고 매일매일 어떤 일들을 마주 할 텐데요. 잘 견뎠어, 재밌었어, 잘했어, 고마워할 수 있는 관계가 생기고, 그 과정에서 조금씩 함께 성장하는 모습을 발견하고 맛보면서 사는 게 가장 풍성하고 좋은 삶을 사는 거라고 생각을 해요.
실험을 계속해 올 수 있었던 힘
떼돈을 벌지도 못했지만 그렇다고 와장창 망해서 빚을 잔뜩 지지도 않았어요. 14년 동안 고만고만한 모험을 하면서 아슬아슬하게 지금까지 버텨온 게 아니었을까 싶어요.
제가 장애랑 농사를 연결 지은 것은 경계를 넘나드는 제 성향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는 거 같아요. 새로운 연결고리가 보이고, 가능성이 떠오르면 실험해보고 싶어요. 그러다 보니 크고 작은 무모한 일들을 계속 벌이게 되요. 물론 벌여놓은 일을 꾸준히 계속하는 게 어렵긴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안에서 새로움을 계속 찾아내려고 해요. 그래도 지금까진 방향을 잘 잡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결국에는 장애와 농사가 만날 수 있다는 믿음
장애랑 농사가 만나면 파바박 기적이 일어나서 모든 것이 다 순조롭게 해결되는 일은 생기지 않을 거에요. 그럴 수 있는 일도 아니죠. 저는 <꿈이자라는뜰>이 생물다양성(Biodiversity)과 신경다양성(Neurodiversity)이 넘치는 공간이면 좋겠어요.
ADHD라든가, HSP라고 매우 민감한 사람들이라든가, 아스퍼거나 자폐라든가, 이런저런 다양한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일컬어서 신경다양성이라고 얘기를 해요. 저도 돌이켜 보면 신경 다양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생물다양성을 지키는 게 결국에는 생태계를 건강하게 유지시키는 핵심이 될 거다라고 이야기를 하잖아요. 신경다양성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사회 어디든지 계속 잘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이 되려면 다양성이 살아 있는 공간이어야 하겠죠. 이 다양성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들어 줄 거라는 믿음이라고 해야 하나, 기대라고 해야 할지, 그게 제게 있어요.
다양성이 인정되고 발현되는 곳과 아닌 곳의 차이가 분명히 있어요. 그 다양성 안에 장애도 들어가고 성소수자도 들어가고 여성과 노인, 아이를 비롯해 다양한 세대도 들어갈 거고 원주민과 귀농한 사람들도 들어갈 거고요. 근데 크레파스가 한 통에 10개가 있다고 해서 다양성이 넘친다고 말하지 않잖아요. 이게 어떤 식으로든 연결이 되거나 만나야 해요.
‘농’과 ‘촌’, 그러니까 농사와 마을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장애를 비롯한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구성원들이 스스로를 살피고 서로를 보살피는 법을 익히며 자기 모습으로 살아가는 좋은 삶을 함께 만들어가는 것. 이게 <꿈이자라는뜰>의 목표에요. 바탕이 되는 공유지(Commons. 공동체의 공유 자산)를 확보하고 그 안에서 풍성한 관계와 좋은 삶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바라기는그런 공유지가 적어도 마을 단위에 하나씩, 면 단위에 하나씩은 생기면 좋겠어요.
돈을 어떻게 벌까를 고민하는 것과는 다른 지속 가능성을 만들 수 있는 고민
기본소득 75만 원. 너무 조금 불렀나?(웃음) 지금처럼 그냥 계속 살 수 있으면 좋겠어요. 하루빨리 국민연금 받으면서 사는 나이가 됐으면 좋겠어요. 조금 더 기대한다면 농사꾼은 국민연금을 더 빨리 받는 걸로 하면 좋겠다.
꿈뜰 같은 경우는 500평 내지 1,000평을 안전하게 우리 걸로, 혹은 확보할 수 있는 커뮤니티 공간을 만들 수 있으면 그 안에서 지금처럼 즐겁게 잘 살지 않을까 생각해요. 어쨌든 농사짓고 농촌에 살면 그렇게 큰돈이 들어가는 건 아니니까요. 입에 풀칠하기 위해서 억지로 일하는 시간이 최소한이면 좋겠어요.
원대한 꿈은 땅 부자가 되는 거예요. 가늠할 수 없을 만큼의 많은 땅을 소유하는 거예요. 그래서 공유지를 많이 만들 수 있으면 좋겠어요. 꿈뜰도 그런 공유지 중에 하나가 됐으면 좋겠고요. 법적인 소유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안정적으로 쓸 수 있는 땅을 구할 수 있게 된다면 그 땅에서는 조금 더 길게 보고 생산성을 천천히라도 높일 수 있는 방식을 찾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돌멩이 하나를 쌓더라도 그게 갑자기 사라지지 않는 어떤 공간이라면 천천히 오랫동안 쌓아서 방 하나 만들고 집 하나 만들어 내는 일을 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숲이 있고, 밭이 있고, 모두의 화장실도 있고, 음식을 해먹을 수도 있고, 또 모여서 공부하거나 쉬거나 일하거나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어떨까? 큰돈은 못 벌겠지만, 돈을 어떻게 많이 벌까를 고민하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의 지속 가능성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신이 세상에 단 한 가지 문제만 해결해줄 수 있다고 한다면
어떤 돈으로 환산되는 가치나 가격이 같은 것 끼리는 다섯 배가 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가 귤을 사는데 가장 싼 귤과 가장 비싼 귤의 차이가 다섯 배가 넘지 않는 식으로요. 혹은 최저 시급이 1만 원이라면 최대 시급은 5만 원인 거죠. 자동차도 같은 수준의 자동차라면 가장 싼 자동차와 가장 비싼 자동차 단가가 다섯 배 차이만 나도록요. 사람이 죽을 때, 재산은 다 내놓고 간다. 이런 것도 생각해 봤는데요. 개인이 소유한 자산은 죽는 즉시 공공으로 돌아가는 거죠. 하지만 역시 다섯 배 제한으로 가는 게 좋겠어요.
인터뷰가 끝나갈 즈음 최문철 님(보루)이 말했습니다. “이거 다 어떻게 정리하려고?” 아차, 이야기에 빠져 듣다보니 시간가는 줄 몰랐네요. 2시간 넘는 대화의 녹취를 풀고 보니, 보루는 특별히 길고 자세한 설명의 해설사였습니다. 평소 대화만 할 때는 세심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글로 정리하려니 눈이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14년 시간을 쌓아온 이야기를 듣는 것이 가벼운 일은 아니겠지요. 이웃이자 선배인 최문철 님의 깊은 속을 곱씹어 살펴 볼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큰 행운이라 생각합니다.
“나는 우리를 성벽의 사람들이라 여긴다. 시대를 통틀어 우리는 지구의 변두리에 진을 쳐 왔다. 관습에 얽매인 겁 많은 동포들과, 중세지도에 “용과 들짐승이 들끓는다.”고 기록된 알려지지 않은 땅, 그 사이에 놓인 완충지대에 말이다. 우리의 운명이란, 한쪽으로는 용이 내뿜는 불길을 맞으며, 주류 문화가 삐그덕대며 허물어지는 중에 자기 도취를 깨뜨린다며 되레 우리더러 야단하는 걸 견디는 것이다.”
<문명을 지키는 마지막 성벽 위에서> 중, 진 록스던, 상추쌈 출판
별명을 지을 때,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으나, ‘보루’라는 단어가 적을 막기 위하여 튼튼하게 쌓은 구축물을 뜻한다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구조물에서는 가장 약한 곳이 전체의 약점이라고 한다는데요. 다른 곳이 아무리 튼튼해도 한 지점이 무너지면 전체가 쓰러지기 때문이겠지요. 장애라는 약한 곳에 보루를 만들어가는 <꿈이자라는뜰>과 최문철 님이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지 함께 해보고 싶어졌습니다.
<꿈이 자라는 뜰> 자세히 알기
인터뷰이 | 최문철 글·정리 | 이동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