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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닮은 사람, 송악 반딧불이 지킴이 강영서


자연을 닮은 사람

송악 반딧불이 지킴이, 강영서



혁신살롱 인터뷰를 시작할 땐 언제나 종이 한 장을 먼저 건넨다. ‘당신이 좋아하는 공간을 그려주세요’. 그럼 인터뷰이들은 십중팔구 당황하며 ‘아유 그림을 못 그리는데’ 하면서 어색하게 펜을 잡는다. 강영서 씨는 오랜 고민 없이 펜을 들고 쓰윽 길 산 두 개를 그리더니 그 밑에 길 하나를 낸다. 그러고는 그 길에 피는 코스모스, 샤스타데이지, 꽃 양귀비 같은 이름들을 하나씩 말하며 환하게 웃는다.

그는 자연에게 받은 것들을 돌려주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받은 게 많아서인지 그는 쉬는 날 없이 바쁜 일상을 보낸다. 그는 반딧불이도 지키지만, 마을의 사람들을 먹이고 돌보며 공동체를 지켜낸다. 꽃처럼 웃고, 바람처럼 다니고, 나무처럼 우직하게 견디면서. 자연을 꼭 닮은 그의 일상을 소개하고 싶다.

  

강영서 씨가 좋아하는 공간이 있으신가요? 

송악 유곡리라는 동네 산 밑에 살아요. 마을 안 쪽으로 저희 집이 달랑 하나 있어요. 집으로 들어가는 비포장 길이 하나있는데 그 앞에 차를 세워놓고 일부러 걸어가거든요. 그럼 가는 길에 계절마다 다른 꽃이 피어요. 가을에는 코스모스, 봄에는 샤스타데이지가 여름에는 꽃양귀비가 피죠. 일부러 가로등을 못 키게 하고 포장을 못하게 했어요. 그러니 반디가 많이 사는 공간이에요.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이 길을 걷는 것이 그렇게 좋아요. 제가 가장 사랑하는 길이에요.

그리고 집 앞에 작은 정원이 있는데요, 저는 그 곳에서 풀 메는 시간을 좋아해요. 남들은 풀 뽑는 것 지겹다고 하는데 저는 그게 마음의 번뇌를 뽑아내는 시간처럼 느껴져요. 그 시간이 제에겐 가장 소중한 시간이에요.

  

송악에서 반딧불이 지킴이 활동을 하고 계신다고 들었어요.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처음에는 환경 해설가로 일 했어요. 아산지속가능발전협의회라는 시민단체에서 활동을 하면서 2013년에 반디보존위원회라는 걸 만들었어요. 살고 있는 송악마을에 반딧불이가 이렇게 많은데 보존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단 생각을 했어요. 이 활동은 처음부터 협의회 의제는 아니었지만 지역의 필요에 의해, 주변에 관심 있는 분들과 모여 시작했죠.

 

반디 보존 위원회는 주로 어떤 일을 하시나요?

봄부터 가을까지 세 종류의 반디가 발견돼요. 반디의 개체수를 확인하기도 하고, 어떤 온도와 습도, 환경을 좋아하는지 기록하고 점검하는 일을 해요. 시작했을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 반딧불이 연구가 잘 되어있지 않은 때였어요. 논문을 찾으려 해도 찾기 힘들었어요. 그래서 위원회 사람들이 모여서 따로 공부를 해야 했어요. 워크숍도 하고, 반디 박사님들을 수소문 해 모셔오기도 했어요.

관찰을 오래 하다보니 이런 일도 있었어요. 날이 유난히 춥던 겨울이 있었는데 다음 해에 암컷과 수컷의 비율이 확연하게 달라졌을 때가 있어요. 저희가 배우기론 수컷과 암컷의 비율은 보통 5대 1이라고 했는데, 그 해를 지나고 보니 암컷이 바닥에 쫙 깔려있더라고요. 그래서 온도 차이가 나면 암수의 비율이 달라진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한번은 가르쳐주신 반디 박사님이 그런 연구 결과는 없다고 웃으시더라고요. 한참 후에 제가 서울에 광릉수목원에서 곤충을 연구하시는 박사님을 만나뵌 적이 있는데요 그곳에서 어느 곤충 연구하시는 분이 장수하늘소로 비슷한 연구를 진행하고 계신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곤 자신들의 연구결과와 유사하게 나온다는 말씀을 하셨죠. 저희가 현장에서 관찰을 하면서 발견하게 되는 것들이 있더라고요.

 

실험실이 아닌 공간에서,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도 현장에서 이런 배움을 할 수 있군요! 관찰은 어떤 방식으로 하나요?

 송악에 반딧불이가 나오는 곳이 예닐곱 곳이 있어요. 한 구역 당 한 명이 배치 되요. 반디가 주로 밤 9시에서 새벽 2시에 활동을 하니 그 시간에 나가야 해요. 반디 특성상 불빛을 보면 교란이 일어나기 때문에 캄캄한 밤에 불빛도 없이 숲 속을 가야하거든요. 제가 하도 밤에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저희 어머니가 따라 쫓아나오셨다가 깜짝 놀라신 거예요. 숲길이 워낙 깊고 어두우니깐요. 어머니가 걱정을 하시면서 그 일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긴 하지만 가족들을 걱정시키는 일이긴 하죠. 

그렇게 몇 년을 각자 맡은 활동을 했는데 어느 순간 이런 방식으로 지속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들었어요. 중요한 일이지만 활동도 지속 가능성을 담보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조금 더 활동의 의미를 살리면서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을 모을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그러다 마을의 아이들, 청소년들과 함께 하면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가까운 중학교에 가서 제안을 드렸죠.

 아이들과 함께 반디 모니터링을 하고 싶다고 말씀드리고 자원봉사센터와 연계해서 봉사 시간을 주기로 제안했어요. 대신 늦은 밤에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이들과 보호자와 함께 활동을 하는 것으로 말씀드렸어요. 만약 아이가 10명이 오면 보호자도 10명이 오기 때문에 조금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으니 1석 2조였죠. 학교의 허락을 받고 안전한 구역에서 아이들과 보호자들이 함께 모니터링 활동을 시작했어요. 그게 지금 4년째에요. 4년 동안 학교를 졸업한 아이들도 있는데 졸업을 하고도 모니터링을 계속 하냐고 물을 정도로 관심이 높은 활동이에요.


 

이렇게 자연스럽게 마을과 생태교육이 연결되다니, 정말 좋은 선택이었네요.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가 있으신가요?

매 주 밤에 나와 해야 하는 일이라 고단할 수 있는데 아이들이 열심히 참여하더라고요. 환경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고요. 그리고 아이들이 중학생 정도가 되면 부모님과 대화하는 걸 어려워하잖아요. 그런데 깜깜한 밤을 부모와 함께 걸으니까 좋았던 거예요. 1년 모니터링이 끝나면 전교생에게 활동 보고 하는 시간이 있는데 그 때 후기 중에 반디 모니터링도 좋았지만, 부모님과 밤길을 걸으며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는 이야기가 많이 있었어요.

 

그 장면을 상상하니 너무 아름다운 풍경이 그려져요. 어두운 밤길에 아이와 부모가 서로 서먹하게 대화를 시작하고 반딧불이가 한 두 마리 날아오는 장면이요.

 맞아요. 학교에 아빠와 함께 사는 여자 아이가 있었는데 사춘기가 좀 심하게 온 아이였어요. 웃는 것을 거의 못 봤거든요. 그 아이가 반디 모니터링을 함께 하고 싶다고 아빠에게 말씀을 드렸는데 아빠가 시간이 없다고 거절을 했다는 거예요. 아이는 큰 용기를 낸 거였는데. 제가 그 아빠를 만나서 '아이가 그렇게 손 내밀었을 때 잡아라,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모니터링을 함께 해라' 했는데 실제로 아빠가 시간을 내서 모니터링을 함께 나왔어요. 나중에 그 아이가 발표하는 시간에 '아빠와 함께 걷는 시간이 너무 좋았다' 이런 얘기를 했어요. 환경에 대한 관심도 물론이지만 가족과 특별한 시간을 보내고 사이를 돈독하게 만드는 데도 도움이 되는 활동이였죠.

 그런데 또 학교에서 활동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함을 느꼈어요. 학교뿐만 아니라 지역 분들이 반디를 지키는 일에 동참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2020년에 비가 많이 왔을 때가 있었잖아요. 수해가 심해서 송악이 재난지역으로 정해졌어요. 개울이 범람해 복구 공사를 해야 했죠. 그런데 하필이면 복구 공사를 해야 하는 곳이 반디가 사는 공간이었던 거예요. 공사를 하면 뚝을 다 무너뜨리고 흙을 뒤집고 시멘트를 붓게 되거든요. 그럼 반디의 유충이나 서식지가 다 사라지게 되죠. 그래서 여러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반디를 이주시키기로 결정을 했어요.

 

반디를 어떻게 이주시키는 건가요? 

반디가 나오는 밤에 사람들이 모여 불빛을 보고 잡는 거예요. 조용히 있으면 날지 못하는 암컷과 유충이 불을 내니까 그걸 핀셋으로 잡아 한 마리씩 담아요.

 

대단하고 귀여운 일 같아요. 어른들이 쪼그려 앉아서 조용히 반디를 잡고 있는 풍경이 떠올라요.(웃음) 

그 작업을 마을 사람들과 2년 동안 했어요. 주민자치위원회에 마을 사업으로 제가 제안을 했거든요. 반디를 보존하는 것으로 송악이 아산의 청정지역이라는 이미지를 살리자고, 우리가 보여주자고 막 설득했어요. 주민자치위원분들 중에는 마을 이장님, 새마을운동 하시는 분들, 다양한 분들이 계셨거든요. 처음에는 동네 발전을 저해한다 생각해 반디 서식지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는데 나중에 몇 번 활동을 하시고는 우리 마을에 반디를 옮겨도 되냐, 내가 서식지를 잘 관리해보마 하시더라고요. 반디가 살기 좋은 환경이 되려면 풀도 완전히 깎지 않아야하고 달팽이나 다른 곤충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이 되어야한다 말씀드렸는데 노력 많이 하고 계신 것 같아요. 그걸 다 지켜주셨어요. 여기 유곡리에서 잡은 것을 저쪽 강장리로 옮기다던가. 이런 이주 작업을 2년 동안 했어요.

  

송악은 원래 공동체나 교육으로 유명한 마을이잖아요. 이런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되어 송악으로 이주하신건가요? 

저는 이곳이 원래 고향이에요. 어렸을 때부터 여름에 멍석 깔고 누워 옥수수 먹으면서 반딧불이를 봤던 기억이 있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외지로 나가고 직장 생활도 서울에서 하게 되었죠. 결혼하고 아이들을 키우는데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쯤 제가 무엇을 물려줄 수 있는지 고민하게 되었어요. 서울에 살면서 이렇다 할 재산도 없고 친구 같은 형제를 많이 만들어줄 수도 없었고요. 그런데 제 고향인 송악에 오면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하고 행복한 아이들을 많이 보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이들을 이곳의 학교로 보내자고 결심을 했어요. 남편도 할 수 없이 허락을 하고 이사를 하게 되었죠. 그게 2011년이에요.

 그렇게 송악으로 이사를 하고 집 근처에서 반디가 날아가는 것을 보게 된 거에요. 어렸을 때 보았던 반디가 아직도 남아있구나! 무척 반가운 마음이 들면서 이걸 지켜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지속가능발전협의회 쪽에서 제안이 왔을 때 기꺼이 모니터링 활동을 시작하게 된 거죠.

 저희가 모니터링을 하다 보니까 아직도 송악에 집단적으로 서식하는 곳도 있더라고요. 한 곳에선 780마리까지 세본 적이 있어요. 이런 건 코타키나발루 이런 곳에서 반딧불이 투어를 가야 볼 수 있는 건데 송악에서 그걸 본 거에요! 그곳이 저수지 주변 수자원공사 땅이었어요. 그런데 며칠 후에 가보니 저수지를 넓힌다고 땅을 파서 서식지가 순식간에 사라진 거예요. 그래서 이건 우리끼리 모니터링을 해서 유지되는 것이 아니란 생각을 했죠. 지역의 네트워크를 만들고 더 많이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공무원과 수자원공사 담당자들과 협의 자리를 만들었죠. 오랜 대화 끝에 반디가 나오는 길에 낚시꾼들이나 차가 들어가지 못하게 차단막을 설치하는 성과를 이뤘어요. 최근에 늦반디 성충들이 날아다니는 걸 관찰하게 된 거죠.

 

관찰에만 그치지 않고, 좋은 성과를 이루었네요. 

또 있어요. 이렇게 네트워크를 맺다 보니 시에서 먼저 제안을 해주시기도 했어요. 수해 복구 공사가 늦어져서 최근에야 공사를 시작하게 되었는데요, 공사를 하기 전에 담당 공무원이 먼저 연락을 주신 거예요. 이곳이 반딧불이가 나오는 곳이냐, 그럼 어떻게 공사를 하면 좋겠냐고 먼저 물어와 주셨어요. 근처에 논이 하나 있는데 그 곳을 구입해서 반디 서식지로 조성을 해주시겠대요. 그리고 뚝 공사를 할 때도 파헤치지 않고 친환경 공법으로 떠놓았다가 그 자리에 다시 얹어주는 방식으로 일을 하시겠다고 자료를 찾아서 막 보내주셨어요.

 


보통 시에서는 귀찮으니까 주민들에게 물어보지 않고 막 공사를 해버리잖아요. 특별한 사례로 느껴져요. 기존에도 관계가 있으셨던 건가요?  

저희가 오랫동안 해온 모니터링 과정을 지켜보셨던 것 같아요. 송악 저수지 일 하면서 협의 자리를 만들고, 그 때 저희가 조사한 데이터들을 시에 다 넘겨드렸거든요. 그러니 관심 갖고 협조해주셨던 것 같아요. 직접 나오셔서 모니터링 활동에 참여하시기도 하고 적극적으로 대안을 마련해주셨어요. 단 한 마리라도 살려보자는 말씀을 먼저 해주세요.(웃음)

  

이렇게 좋은 협치의 경험을 듣는 것이 반가워요. 그럼 선생님은 원래 이런 지역 활동에 관심이 있으셨던거예요? 서울에서도 이런 일을 하셨던건가요?

 전혀 관계없는 일을 했죠. 처음에 송악으로 이주했을 때도 소비자로서 시골을 누렸었어요. 시골의 힐링타임을 즐겼죠. 그런데 어느 순간 이게 다 소비되고 사라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죠. 나도 무언가를 생산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어느 순간 하게 되었어요.

 

생산이라면 무엇을 말하나요? 농사를 짓는 것? 

우리는 자연이 주는 선물을 받기만 하잖아요. 마트에서 남이 해준 농산물을 먹기만 하고요. 그런데 저는 환경을 지키는 일이나, 농부를 위해 뭔가 활동을 하는 것도 생산자의 활동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반딧불이 지킴이 활동이나 마을 활동도 그런 관점에서 시작하게 된 거죠.

 송악에 거산초등학교라는 학교 덕분에 마을이 살아나기 시작했는데 아이들이 중학교가 되면 또 외부로 학교를 가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송남중학교까지 마을교육이 연결 되게끔 활성화 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을에서 아이들에게 교복을 사주고, 진로 캠프를 만들고 장학금을 주자고 의견을 모았어요. 희망장학금이라고. 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마을에서 축제를 열었죠. 이후로 그게 송악예술제로 이어졌고요. 제가 때마다 국밥을 200인분을 끓이고 완판하는 사람입니다.(웃음)

 


에너지가 대단하신 것 같아요. 환경 교육사, 모니터링에 마을 일까지. 에너지가 10만큼 있다면 어떻게 분배해서 쓰세요?

저의 주된 직업은 환경 교육사에요. 인형을 직접 만들고 대본도 쓰면서 인형극으로 환경 교육을 하죠. 주민자치회나 마을 일은 주로 봉사로 하고요. 수입이 되는 일은 주로 3할로 일하고 나머지 5정도는 마을을 위해서 써요. 학교에서 요청이 들어오면 숲 생태 교육을 하기도 하고요. 나머지 2는 가정 일에 쓰고요. 아이 둘을 키워야 하고.. 농사도 짓고 마당 풀도 뽑아야하고요. 말하고 보니까 너무 바쁘네요.

 

혼자 가만히 쉬는 시간은 없으세요?

일요일 날 쉴 수 있으면 쉬는데요, 쉬는 날에도 밭에 나가있어요. 저는 화단의 꽃들 정리하고 풀 뽑는 게 쉬는 시간처럼 느껴지더라고요. 가만히 누워있으면 뭔가 소비되는 시간, 아까운 시간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에너지를 얻는 방법이 다른 것 같아요. 게다가 마을에서 가야금하고 기타를 배우기도 해요.

 

몸은 괜찮으신가요?

제가 평소에 먹는 것도 잘 먹고 건강 체질인 줄 알았는데, 2014년에 갑자기 뇌출혈이 온 거에요. 주변 사람들이 다 깜짝 놀랐어요. 저처럼 풀 뜯어 먹는 사람도 이런 병에 걸린다고요. 병원에 가보니 의사 선생님은 몸이 피로하다는 신호라고 말씀하셨어요. 남편도 돈도 안 되는 일에 왜 이렇게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쓰냐고 화를 내기도 했죠. 그럴 때마다 저는 마을에 일 할 사람이 없잖아, 그래서 내가 하는 거야, 라고 말해요. 마을 일, 환경에 관한 일은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모든 걸 돈으로 환원해서 볼 수 없는 것 같아요.

 제가 받은 것을 많이 돌려줘야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항상 숲에 가면 좋고 자연을 통해 기운을 얻어요. 실제로 제가 먹고 마시는 것이 모두 자연에서 나오죠. 뇌출혈 수술 이후에 한동안 후각을 잃었어요. 밥을 먹어도 먹는 것 같지 않고, 조금 힘들었죠. 그런데 봄에 숲 속을 산책하는데 어느 순간 숲 속 공기가 제 안으로 훅 들어오는 거예요. 그 냄새를 맞으니 후각이 천천히 회복되더라고요. 저에게 자연은 종교에서 느끼는 가치와 비슷하게 느껴져요. 위안을 얻고 힘을 얻고 신성한 것이에요. 저희 아이들도 이런 가치들을 잘 배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늘 들어요. 이 빚을 언제 다 갚을 수 있을까, 이런 마음으로 활동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소박한 꿈이 있으시다면?

우리 아이들, 마을에 사는 아이들이 이 지역에서 계속 살게 되는 거요. 이 곳에 얼마나 많은 생명이 살고 있는지 알았으면 좋겠어요. 곤충을 잘 알게 되면 무섭지 않거든요. 생명에 대해 배우고 관찰하고 사랑하는 아이들로 자라났으면 좋겠어요. 그런 아이들이 공무원이 되고 정치인이 되고 환경을 아는 사람들도 자라면 나중은 지금 보다 더 나은 사회가 되겠죠. 그 발판을 우리가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그게 저의 소박한 꿈입니다.

 

너무 원대한 꿈으로 느껴지는데요? 그럼 원대한 꿈이 궁금해요.

전 지구적으로 환경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건강한 지구를 만드는 것이에요. 그리고 또 하나, 공동체성의 회복이요. 제가 서울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있는데요. 시골 출신이니까 마을 어르신들이 모여 계신 것을 보면 항상 먹을 것을 들고 인사를 나갔거든요. 그걸 이상하게 보실 때가 많아서 적응이 잘 되지 않았어요. 심지어는 도망도 가시더라고요.(웃음) 이유 없는 친절이 부담스러우신거죠. 그래서 도시에서도 서로 따뜻한 정을 나누는 것이 익숙해지는, 그런 공동체성이 회복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우리 아이들이 만약 시골로 돌아오지 않고 도시에서 살게 되더라도, 조금은 행복하게 지낼 수 있겠죠. 그렇지만 서울에서 팍팍하게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 곳에 있으면 모든 지역 어르신들이 절 돌봐주시기 때문에 아이들도 그렇게 돌보면서, 돌보아지면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강영서 씨는 처음에 몇 명의 동료들과 함께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마을의 아이들이 참여하고, 주민자치위원회의 어른들도 나오고, 심지어는 담당 공무원까지도 반딧불이 보존 활동을 함께 했다. 대화를 나눌수록 왜 이렇게 동료가 늘어나는지 알 수 있었다.

그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밤 풍경을 상상해보았다.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이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는 서먹한 아이들과 부모, 밤 마실 나온 노인들의 모습. 그러다가 반짝, 반딧불이 불빛이 나오면 모두 탄성을 참아내며 환하게 웃는. 그런 풍경 말이다.

어두운 밤의 작고 아름다운 불빛. 반딧불이를 닮은 그가 있는 한, 그와 함께하는 동료들이 있는 한 그 아름다운 장면은 계속될 것 같다. 그랬으면 좋겠다.



인터뷰이  | 강영서     글·정리 | 박소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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