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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에서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 혁신가들을 발굴하고 인터뷰하여 

사회혁신 인적 기반의 토대를 다지는

사회혁신가 발굴 및 저변 확대 프로그램

음악이라는 꿈, 특수교육이라는 사명. <사단법인 모두함께문화예술원> 대표 김희수


음악이라는 꿈, 특수교육이라는 사명

사단법인 모두함께문화예술원 대표 김희수



문화예술은 모든 인간이 행복하게 즐겨야 할 권리라고 말하는 아티마의 김희수 대표를 만났다. 누구든 평등하게 누려야할 권리라도 그것에서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은 존재한다. 아티마는 문화예술에서 소외된 이들을 위해 설립된 문화예술단체다. 아티마(ATIMA)는 All Together Institute of Music and Arts(사단법인 모두함께문화예술원)의 약자다. 대표적으로 발달장애 청소년 합창단인 볼레드 합창단을 운영하고 충남도지사상과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장애인에 관한 긍정적인 인식 확산에 기여하고 있다.

아티마에 모인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가 아름다운 화음을 내며 사람들에게 감동을 선물하기까지 모든 과정에는 김희수씨가 큰 몫을 했다. 30대에는 특수교육 활동가로, 50대까지는 지휘자로, 지금은 아티마의 대표로. 다양한 커리어를 쌓으며 삶을 연결지어온 희수씨의 삶의 궤적을 들을 수 있었다. 희수씨는 자신이 세상에 존재하는 의미와 역할을 항상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자기 꿈과 정체성이 딱 맞아떨어지는 길을 발견한 게 정말 즐겁고 행복하다고 말했다.

 


희수님의 이력이 흥미로웠어요. 대학시절에 성악 전공을 하셨더라고요. 심리학 그리고 특수교육 학위도 있으시죠? 이런 교육과정을 밟아온 이유가 뭘까 궁금했어요.

크리스찬에게는 한 마디로 하늘의 콜링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요. 뭘 하고 살아야할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20대의 저는 음악밖에 몰랐어요. 초등학교 4학년부터 늘 노래하고 연주하고 콩쿨에 나가는 그런 인생이었어요. 아름다운 프리마돈나가 되는 게 꿈이었죠. 그런데 갑자기 건강이 안 좋아졌어요. 그러면서 노래하는 게 어려워졌고요. 성악에서는 체력이 중요하거든요. 노래로 성공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어요. 그런데 음악은 계속 하고 싶으니까 다른 쪽으로 팔을 뻗은 거예요. 사실 시대가 지금 같으면 그때 바로 지휘 공부를 했을 것 같아요. 엄청 오래된 시대도 아니고 그래 봐야 80년대 초였는데도 당시에는 여자 지휘자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그쪽으로 생각을 못했던 거죠. 대신 음악 이론을 공부해서 이걸 가르치는 일을 해보자 싶었어요.

 

특별히 장애인을 가르치는 특수교육학을 공부하신 계기가 있으신가요?

우리나라에 음악교육과가 없어서 일단 교육심리학과에 들어갔어요. 보육원 같은 곳에 가서 상담실습도 하다 보니 사회에서 소외 받는 계층에 관심이 생겼어요. 그러다가 미국 유학을 가게 됐는데요. 우연히 그곳에 있는 발달장애아동센터에서 봉사를 하게 되었어요. 음악치료라는 분야도 없을 때였지만 음악으로 발달장애인과 소통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죠. 제가 유학한 곳이 일리노이 대학이었어요. 큰 학교이고 한국인 유학생도 참 많았는데, 그 많은 유학생 중에 특수교육 쪽으로는 공부하는 학생들이 단 한 명도 없더라고요. 사명감에 더 불탔어요. 단지 다르게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계속 차별받고 교육에서도 외면 받는 아이들을 가르쳐보고 싶다는 마음이 피어올랐죠.

 

특수교육 학위를 받고 한국에 오신 뒤에는 어땠나요?

제가 공부하면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게 뭐냐면 발달장애인의 탈시설화였어요. 고등학교까지는 나라에서 교육을 시켜주지만, 성인이 되면 학교든 직장이든 이 발달장애인들이 있을 수 있는 자리가 없어요. 보호소 같은 시설에서 평생 지내는 삶을 산다는 걸 알게 됐죠. 때마침 미국에서 탈시설화 운동이 막 일어나는 시기였어요. 특수교육계에서는 최첨단을 공부해서 청운의 꿈을 안고 한국에 돌아왔는데, 한국은 불모지였어요. 공교육에는 틈이 없어 보였고 공동육아연구원이라는, 학부모들이 출자해서 아이들을 돌보는 대안적 어린이집이 있었는데 거기서부터 시작을 했죠. 우리나라 장애인 인구가 비장애인 인구 대비 10% 정도니까 이 어린이집 인원이 30명이면 적어도 3명은 발달장애인을 받는 것으로요. 이곳에서부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이 사회에서 어우러져서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보자고요. 제 나름의 운동이었죠. 강의도 하러 다니고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들을 위한 프로그램 기획도 했고요. 환경 문제에도 관심이 많아서 민우회, 한살림 활동도 열심히 했죠. 1993년에 한국에 와서 2000년까지 그런 일을 활발히 했어요. 그런데 그때쯤 제게 안 좋은 일이 닥쳤어요. 한국의 모든 일을 접어야했을 정도로 감당하기가 어려운….


 

(출처:아티마 홈페이지)


"단지 다르게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계속 차별받고 교육에서도 외면 받는 아이들을  가르쳐보고 싶다는 마음이 피어올랐죠. "



어떤 일인지 물어도 될까요?

둘째아이를 가졌는데 안면에 기형이 있었어요.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들더라고요. 다 털고 음악을 다시 해야겠다는 결심이 들었어요. 다 떠나서 그냥 아무 걱정 없이 노래를 부르고 음악을 사랑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내가 웃어야 우리 아이들도 웃으면서 자랄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한국에서의 일을 정리하고 미국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떠났어요. 그렇게 다시 음악 공부를 시작했어요. 평생 하고 싶었던 지휘 공부를요. 그때가 2002년이었거든요. 그때 돼서야 용기가 나더라고요. 불법체류자로 7년을 살았어요. 그래도 일이 잘 풀려서 8번에 이르는 아이 수술도 잘 마치고요. 졸업도 하기 전에 카톨릭 큰 교구의 음악 감독으로 취직이 된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충분히 벌어서 우리 아이들을 키우면서 살만한 능력이 된 거죠. 그렇게 지휘하면서 음악활동하고 아이들도 다 키우고요. 10년을 그렇게 살았네요. 원이 없었어요.

 

원이 없는 삶을 미국에서 보내고 계셨는데 다시 한국에 오시게 된 건 어째서인가요?

그 사이에 저는 영주권도 받고 직장도 다니고 아이들도 다 크고 했는데, 1년에 한 번씩 휴가 받아서 한국 가보면 어머니가 매년 늙어가는 게 보이더라고요. 안타깝더라고요. 그래서 어머니를 모시려고 영주권도 연봉 좋은 직장도 아이들도 두고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어머니가 무척 특별한 존재였나 보네요.

어머니가 일제시대, 그 시대에 고등학교까지 나온 분이었어요. 집에서 시집보내려는 걸 보리쌀 훔쳐가지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서 남의집살이하면서 고학으로 고등학교까지 나오신 거예요. 그런데 정신대에 착출이 된 거예요. 그래서 정신대 안 가려고 얼굴도 모르는 우리 아버지랑 결혼을 했대요. 아버지는 징용이 돼서 일본으로 건너가시고 어머니가 저를 혼자서 키우셨어요. 어머니가 참 똑똑한 신여성이셨는데요. 같은 여성의 입장으로 봤을 때, 기가 막힌 어머니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도 어머니가 사회적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때니까 저에게 기대를 많이 하셨어요. 한국에 돌아와서 어머니랑 딱 10년을 살았는데 작년에 돌아가셨네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10년간의 삶은 어땠나요? 아티마는 설립된지 1년이지만, 볼레드 합창단은 그보다 역사가 깊은 걸로 알고 있어요. 볼레드 합창단과는 어떻게 인연이 되었나요?

지인이었던 지휘자 한 분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자기가 발달장애인 합창단을 이끌고 있으니 도와달라고요. 저한테는 늘 숙제였어요. 특수교육을 하다가, 어떻게 생각해 보면 그 아이들을 버리고 미국으로 가버린 거잖아요. 잊고 살았죠. 그런데 그 연락을 받자마자 ‘다시 나를 부르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 선생님을 도와서 시작한 게 지금 아티마에 속한 볼레드 합창단이에요.

 

결정적인 순간이었네요. 볼레드합창단을 꾸려 나가시면서는 어떠신가요?

놀라울 때가 있어요. 특수교육을 해왔고 발달장애인에 관해서 잘 안다고 생각을 해왔거든요. 공부한 사람들은 머릿속에 학구적으로 분류가 되어 있잖아요. 제게 그 제안을 주셨던 지휘자님이 4부 합창을 해보자면서 파트를 나눠보자고 하는 거예요. 이 분은 저와 다르게 학구적이라기보다 다만 아이들하고 재미있게 노는 걸 좋아하는 분이거든요. 저는 멜로디만 잘 부르면 다행이라고 생각해왔어요. 그런데 정말 4부합창이 되는 거예요. 또 어느 때에는 우리가 미국으로 진출해야 한다는 말을 하시더라고요. America's Got Talent 같은 곳에서 상을 받아야 발달장애인이 이렇게 노래를 할 수 있다는 걸 세상에 알릴 수 있다면서 영어노래를 가르쳐 보자고요. 글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가능한 일일까? 했는데, 되더라고요. 이제 아이들이 열댓곡이 넘는 곡을 영어로 줄줄 외워서 4부 합창을 해요. 일취월장한 합창단이 됐죠.

 

"아티마라는, 우리가 뛰놀 운동장을 하나 어떻게든 마련해놨으니

어머니들 스스로가 여기서 뭔가를 만들 수 있는 터전으로 꾸리시라고요."



볼레드 합창단에서 변화의 가능성을 보셨겠네요.

한국이 합창 공화국이라고 할 정도로 합창단이 많아요. 발달장애인을 위한 합창단도 꽤 있어요. 하지만 이 발달장애인들이 들어갈 직업 합창단은 전무하고, 그들이 전문적인 교육을 받을 곳은 없거든요. 발달장애 특성을 잘 이해해서 이 아이들에게 훌륭한 교수법으로 제대로된 발성교육을 가르칠만한 곳이 없어요. 우리가 해보자고 생각했죠. 시스템을 잘 만들면 발달장애 전문학교가 될 수도 있고 직업 합창단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발달장애인이 얻을 수 있는 일자리는 굉장히 제한적이고 사회와는 동떨어져서 폐쇄되어 있거든요. 음악을 좋아하고 잘하는 발달장애인이 있다면 그걸로 어느 정도 돈도 벌고 정정당당한 사회인으로 성장해 비장애인들과 함께 어울려서 활동할 수 있도록 해보자고 이야기했어요. 그래서 2021년에 만든 게 아티마예요.

 

살아오신 이력을 쭉 이야기해주셨어요. 지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험을 하신 것이 모두 연결성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제야 뒤돌아보니 인생이 오르락내리락 했지만, 일관성이 있는 인생을 삶을 산 것 같아요.

 

일하며 가장 보람 있을 때는 언제인가요?

역시 우리 (발달장애인) 아이들의 성장을 목격할 때 막, 너무 좋죠. 아이들 모두 천재인가 싶어요. (웃음) 가르쳐놓고도 제가 놀라요. 또 우리 아이들은 정말 순수하고 정말 열심히 하고 언제나 고마워해요. 질투할 줄도 모르고 남이 잘되면 박수 쳐주고. 천사 같은 아이들이에요. 힘든 게 하나도 없어요. 이 아이들을 만나서 가르치려고 내가 태어났나보다 싶어요. 제가 젊을 때 성악이라는 꿈을 포기했잖아요. 제 2년 후배가 조수미씨예요. 그 외에도 다른 성악가들의 성공을 보면서 얼마나 제가 부러웠겠어요. 그런 아쉬움이 있지만 이것조차도 우리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나보다 싶죠. 은퇴할 나이인데도 지금 이렇게 성취감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그래서 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이 즐겁고 행복해요.

 

어려운 때는 없으신가요?

단지 제가 법인 대표라는 걸 처음 해보는 데서 오는 어려움이 있어요. 돈을 끌어와야 하잖아요. 제가 가장 못하는 게 돈 계산이에요. 지난 1년은 너무 힘들었어요. 도망치고 싶을 때도 많았어요. 나는 음악하는 사람인데, 왜 공모 사업을 쓰고 영업을 뛰고 있지? 하는 생각에 속 답답할 때가 있었어요. 돈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좋은 일하는 사람이 돈을 더 많이 벌게 되면 좋겠어요. 활동을 이어가게 하는 것 중 제일 중요한 게 돈이더라고요. 어디서 후원을 20억만 딱 주시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텐데. 그런데 지금은 20억은커녕 20만원도 재주가 없으니까. (웃음) 그래도 올해는 많은 지원군이 생겼어요.

 


다행이네요. 어떤 사람들이 아티마와 희수님을 지원하나요?

어머니들이죠. 볼레드 합창단이 올해로 7년차예요. 어머니들과 특히 가깝게 지내게 되었어요. 저에 대한 신뢰가 쌓인 것 같달까요. 서로 고충을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었어요. 꿈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동료라는 생각이 들어요. 정서적인 지원뿐만 아니고 실제로 발로 뛰면서 협력해주시거든요. 이 분들도 부족함 없는 인재들인데 발달 장애인 자녀를 위해 사회적 활동을 다 포기하신 분들이에요. 아이를 중심으로 가정이 변해요. 그런 분들에게 아티마는 꿈을 심어드리고 대신 저희는 지지를 받아요.

 

발달장애인 부모님들이 움직일 수 있도록, 새로운 사회활동의 작은 불씨가 되는 거네요.

그런 것도 자연스럽게 되면 좋겠어요. 어머니들이 그러시길 우리 합창단에 나와서 다른 어머니들을 만나고 소통하는 시간이 힐링 시간이라고 하더라고요. 이 아이들이 여기에 와서 레슨하고 끝이 아니거든요. 진보하려면 집에서 연습해야하는데 연습을 혼자 못하니까 부모님들이 도와주어야 해요. 그래서 어머님들께도 같이 교육을 하거든요. 언젠가는 엄마들 모아서 합창단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엄마들이 같이 레슨을 받는 거나 다름없으니 언젠가는 아이들만큼 노래를 잘할 것 같은 거예요. 제가 지난주에도 그런 얘기를 했어요. 아티마라는, 우리가 뛰놀 운동장을 하나 어떻게든 마련해놨으니 어머니들 스스로가 여기서 뭔가를 만들 수 있는 터전으로 꾸리시라고요.

 

터전이라고 하시니 생각났어요. 희수님에게 가장 의미 있는 공간은 어디인가요? 나를 충전시키는 시간은요? 희수님의 일상도 궁금해요.

그 질문을 들으니까 제가 스스로 조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최근 1년간 너무 저질적인 생활을 하고 있어요. 희망은 산책도 하고 음악도 듣고 하고 싶은데 전혀 못하고 있어요. 먹는 것도 대충 사먹고요. 일이 정말로 많아서라기보다는 일을 효율적으로 못해서 그러는 것 아닌가 싶어요. 유일한 여가가 그냥 소파에 퍼져서 TV를 1번부터 100번까지 돌려보는 거. 그거 같아요. 공간도, 조그마한 방에서 잠만 자고요. 그래도 이번에 공간을 하나 마련할 계획을 가지고 있어요.

 

어떤 공간인가요?

제 살림집하고요. 합창 공연이 가능한 홀이에요. 설계는 끝났고 9월에 완공 예정이에요. 항상 아쉬웠던 게 좋은 무대가 없었다는 거였거든요. 우리 볼레드 합창단이 대통령상도 받을 정도로 실력이 있는데 초청받는 무대가 대게 행사장이에요. 합창에 적합한 공간도 아니고 음향팀이 합창에 경험이 있는 분들도 아니에요. 악조건 속에서 노래를 불러야 하죠. 게다가 우리의 공연이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아요. 본 행사 전이나 후에 하는 식이라서 객석이 텅 비어 있는 채로 공연할 때가 많아요. 행사 식순에 ‘장애인’이라는 단어 하나 끼우려는 것 같아요. 그런 무대 말고 훌륭하고 아름다운 홀에서 우리만을 위한 공연을 하고 싶어요. 햇볕이 잘 드는 좋은 곳이에요. 완성되면 꼭 한번 놀러오세요. 우리 합창단이 무대에 오르는 모습을 꼭 보러 와주세요.

 


나는 한 인물의 전기를 읽는 것을 좋아한다.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고 자신의 꿈을 이루며 세상의 모습을 바꾸는 이야기를 읽는 일은 영감과 희망이 된다. 희수씨의 인생사를 들으면서 좋은 전기 한 권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좌절과 위험 속에서도 주저앉지 않고 행복을 손에 쥐는 이 여성의 이야기가 오늘 나에게 귀감이 되었다. 다양한 톤과 색을 지닌 목소리가 아름다운 화합을 만들어내는 합창단을 지휘하기 때문일까? 희수씨는 소수자와 약자의 다양성을 포용하는 세상의 풍경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갈 길은 조금 멀지만, 이 세상에 우아한 노랫소리가 들려올 그때까지 희수씨를 성원하고 지지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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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이  | 김희수    글·정리 | 김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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